30년 전 추억, 왜 창세기전은 멈추지 않는가?

히스토리

1995년 첫 등장 이후 30년. 창세기전은 왜 여전히 리메이크되고 회자되는가. 한국형 서브컬처 RPG의 선구자가 남긴 유산을 되짚어본다.

1995년,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SRPG 장르였음에도, 등장과 동시에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함께 국산 RPG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창세기전2(1996), 외전 서풍의 광시곡(1997), 템페스트(1998), 그리고 창세기전3 파트1·2(1999-2001)까지. 소프트맥스는 6년에 걸쳐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집요하게 쌓아 올렸다.

독창적 세계관의 탄생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 TONY 일러스트
일본의 유명 동인작가 TONY가 참여한 템페스트의 일러스트

창세기전은 단순한 게임 그 이상이었다. '마장기', '뫼비우스의 우주', '오차율'이라는 독창적인 설정, 그리고 권력과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물들의 서사는 일본 RPG가 지배하던 시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최연규 대표가 이끈 소프트맥스는 이를 통해 '한국에서도 이런 깊이 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JRPG와는 달랐던 비극의 미학

창세기전3 살라딘 버몬트 일러스트
창세기전3의 살라딘과 버몬트 - 비극적 운명의 형제

30년이 지난 지금도 창세기전이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이 악을 물리치는' 일본 RPG의 왕도적 문법과 달리, 창세기전은 비극적 서사와 입체적인 캐릭터로 승부했기 때문이다.

그 서사의 정점에는 '창세기전 3'의 두 주인공, 살라딘과 버몬트의 엇갈린 운명이 있다. 본래 필립과 존이라는 이름의 친형제였던 두 사람은 투르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며 비극의 씨앗을 품게 된다.

탈출 과정에서 형 필립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어 희생했고, 홀로 남겨진 동생 존은 형이 죽었다고 믿으며 오열했다. 하지만 운명은 잔혹했다. 살아남은 필립은 적국 투르의 용병 '살라딘'으로, 형을 잃은 존은 복수심에 불타는 냉혈한 '버몬트 대공'으로 성장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된 것이다.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파국으로 치달았다. 살라딘의 연인 셰라자드는 버몬트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고, 살라딘이 자신 때문에 굴복하는 것을 막고자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동생인 버몬트의 검에 스스로 몸을 던져 자결한다.

최후의 결전, 서로를 베어야 하는 순간 울려 퍼진 피리 소리. 그것은 오직 두 형제만이 공유하던 추억의 멜로디였다. 그제야 버몬트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않던 원수가 죽은 줄 알았던 형 필립임을,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형의 삶과 사랑마저 파괴했음을 깨닫는다. 단순한 권선징악을 넘어선 이 처절한 운명의 비극은, 당시 수많은 게이머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충격과 여운을 남겼다.

김형태와 시대를 앞서간 비주얼

창세기전3 파트2 마리아 카진스키 일러스트
창세기전3 파트2의 마리아 카진스키 - 김형태 일러스트의 정수

창세기전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바로 일러스트레이터 김형태다. 현재 '승리의 여신: 니케', '스텔라 블레이드'를 이끄는 시프트업의 대표인 그는 창세기전3부터 메인 디자인을 맡으며 시리즈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의 작화는 파격적이었다. 신체 비율을 과장하여 강조한 슈츠 디자인, 관능적이면서도 세련된 화풍은 기존 국산 작품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역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창세기전3 파트2의 마리아 카진스키 일러스트에서 보여준 신비롭고 관능적인 분위기와 섬세한 의상 디테일은 당시 국산 게임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또한 '템페스트'에서 시도된 미연시 요소와 멀티 엔딩 시스템은 현재 주류가 된 서브컬처 게임의 문법을 수십 년 앞서 제시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끝나지 않는 리메이크

서풍의 광시곡 리마스터
2026년 출시 예정인 서풍의 광시곡 리마스터

창세기전 IP는 2016년 라인게임즈(구 넥스트플로어)가 인수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2023년 닌텐도 스위치로 출시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과 현재 서비스 중인 '창세기전 모바일', 그리고 2026년 발매 예정인 '서풍의 광시곡 리마스터'까지. 원작의 아버지인 최연규 디렉터까지 다시 합류하며 그 명맥을 잇고 있다.

30년 된 IP가 이토록 끈질기게 다시 만들어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창세기전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한 세대의 '문화적 기억'이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 PC방과 집에서 밤을 새우며 플레이했던 소년들은 이제 3040 세대의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창세기전은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닌, 한국 게임의 가능성을 목격했던 자부심의 원천이다.

마치며

창세기전이 멈추지 않는 힘은 결국 시대를 관통하는 캐릭터와 서사의 힘에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양분 삼아 자란 키즈들이 이제 게임 업계의 주역이 되어, 자신들이 느꼈던 전율을 다시금 세상에 전하려 하고 있다. 30년 된 추억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이유다.

목록 다음 ›